2008년 07월 28일
장난전화 -4-
하지만 꽤나 간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는
나의 기분을 상당히 속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녀석과의 통화내용인 즉슨, 최근 어떤 녀석들과 마치 예전처럼 시비가 붙었는데 과거의 그때와 다르게 오히려 자신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내용이였다.
내 친구놈이, 자존심이라면 나와 쌍벽을 이룰정도로 엄청났던 내 친구놈이 나에게 지원요청을 한것이다.
친구놈이 내게 씁쓸하게 말했다.
" 그때는 우리가 학생이라 시간도 많고 혈기왕성 했는데...
이제는 내가 일을 하다보니 손님들 있을때 장난전화 오면 욕도 못하고... 이번엔 오히려 그 새끼들이 학생이라 아주 미치겠어. 예전처럼 마구 욕하려고 해도 뭔가 민망하고... 젠장 난 이제 늙었나봐. "
나는 친구의 목소리와 정황에서 그때보다 훌쩍 커져버린 우리를 어렴풋이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가슴속 어딘가에서 악동의 혼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나를 간지럽혔다.
그건 마치 상대를 반드시 짓밟고야 말겠다는 그런 잔인한 종류의 느낌이 아니라, ' 이거 재미있겠는데? ' 하는 그런 순수한(?) 느낌이였다.
어쨋든 나는 내 친구에게 나의 참전소식을 알렸다.
" 그래 친구야. 니 맘 알거 같다. 감히 어떤 개같은 놈들이 내 친구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내 친구에게 그놈들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이번엔 한개도 아닌 두개였다.
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대단히 풋풋한 설레임에 빠졌다.
내가 마치 그때의 과거로 돌아간듯한 기분이였다.
그냥 장난전화에 얽힌 추억뿐만이 아닌, 그것과 연관된 그 시절의 모든 추억들이 나를 묘하게 기분좋게 만들었다.
하여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쨋든 참전을 했으니 전투를 시작해야겠지.
이번에도 역시 각종 사이트에 그놈 번호를 팔았다.
차마 고등학교때처럼 길거리에 붙어있는 전단지의 전화번호를 사인펜으로 수정하는 짓은 못하겟길래, 그것만 제외하고 다 했다.
그리고 이번엔 그놈 둘에게 각각 서로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가령 ' 야 오늘 만남 취소됬데 ' 라던지...
' 야 지금 내가 거길루 갈께 ' 라던지..
' 너 내가 빌려준거 어쨋냐? ' 라던지...
하여튼 그냥 아무내용이나 넘겨짚어서 닥치는대로 보냈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야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밤에 시간이 매우 널널했다.
' 이 새끼들아 잠이 오냐? 형이 니들에게 1시간 간격으로 모닝콜을 해주마, 아니 모닝콜이 아니라 새벽콜이다... 이 새끼들 학생때 잠 조금자면 학교가서 죽을 맛이지? 한번 수업시간에 잠이나 실컷 쳐자봐라- '
아르바이트 도중 담배를 필 수 있는 짬만 났다하면 무조건 발신자표시제한을 걸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놈들이 받던 말던 난 핸드폰에 신경 끄고 여유롭게 커피와 담배를 즐겼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예전처럼 끓어오로는 듯한 흥이 안나는 것이였다.
원래 공격을 하면 피드백이 오면서 더더욱 열정을 가지고 공격하게 되는법인데...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내게 부탁한 친구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부탁한 일인데 내가 어찌 귀찮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각종 전화에 괴로워할 그 놈 모습만 상상해도 너무 재미있어서
아무리 내 시간을 많이 빼앗겨도 흥이 절로 났었는데
지금은 그 놈의 괴로워할 모습이 그다지 상상되지 않앗다.
오히려 각종 사이트에 그 놈들의 전화번호를 올리고 있는 나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전화때문에 담배와 커피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는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흥이 나지 않는 이유를 나름 냉철하게 분석해보았다.
' 혹시 적군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 그럴꺼야... 그 놈이 날 열받게하면 불타 오르겠지...? '
나는 지금껏 걸어두었던 발신자표시제한을 풀고, 정정당당하게 내 번호로 직접 그놈에게 전화를 했다.
' 그래 받자마자 일단 욕을 제대로 한탕 해주마, 그럼 너도 나한테 욕을 하겠지? 나한테 욕을 하는 순간 니 핸드폰번호는 바뀔 운명에 처해지는거다. 나는 이미 승리의 경험이 있거든. '
잠깐의 시간 후 그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등학생이라길래 나름 굵직한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여렸다.
' 여보세요? '
기분 탓일까, 그 녀석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좀 피곤해보였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의 전투욕구를 다시 불태우려고 노력했다.
' 여보시긴 뭐가 여보셔...? 내가 왜 니 여보냐? 이 놈 웃긴놈이네? 욕이나 퍼먹어라 '
나는 그 녀석에게 말했다.
" 전화 잘못건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내 가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너무너무 커다래서 약간만 움직여도 가슴이 두근거릴정도였던
집채만한 나의 구렁이는 어디로 갔을까.
내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혀를 낼름거리며 사냥감을 찾아해맸던 구렁이.
갑자기 담배도 커피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구렁이는 아무래도 너무 오래 굶어서 죽어버린것 같다.
아니, 죽지는 않았더라도 어쨋든 내 마음속에서 나가버린것 같다.
본래 구렁이가 독을 품고 내 가슴을 세게 물면
나는 몸이 뜨끈뜨끈 해지면서 뭐든지 한판 붙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는데
아무리 내 가슴을 세게 두드려도 이제는 구렁이가 물지 않는다.
물론 내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구렁이는 내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존재가 될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따금씩 가끔 서로 핸드폰의 발신목록에 한가득 기록되있는 우리의 적군들의 번호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던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우리의 구렁이들이 그립다.
# by | 2008/07/28 07:52 | 그냥 헛소리

